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바라 왕국 (문단 편집) === 카페 왕조 === [[호아나 1세]] 사후, [[필리프 4세]]와 호아나 1세의 장남인 '''[[루이 10세]]'''가 나바라 국왕이자 샹파뉴 백작에 즉위했다. 그는 1314년 11월 29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프랑스 왕위를 겸임했다. 그러나 2년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루이 10세의 갓 태어난 아들 '''[[장 1세]]'''가 프랑스 국왕이자 나바라 국왕으로 선임되었으나 5일만에 사망했다. 이후 루이 10세의 동생 '''[[필리프 5세]]'''가 [[살리카법]]을 앞세워 루이 10세의 딸 잔느의 왕위 계승권을 부정하고 자신이 프랑스 국왕 겸 나바라 국왕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필리프 5세 역시 즉위 6년만에 29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필리프 5세의 자녀인 잔, 마르가리트, 이사벨, 블랑슈는 살리카법 때문에 프랑스 왕위를 계승받지 못했다. 이에 따라 필리프 5세의 동생인 '''[[샤를 4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즉위 6년만인 1328년 33세의 나이로 자식을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이에 잔느는 남편 필리프와 함께 프랑스 왕위에 도전했다. 하지만 그녀의 세력은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6세|필리프]]에 비할 바 아니었기에 프랑스 왕이 될 가망은 별로 없었다. 이에 잔느와 필리프 부부는 나바라 국왕이 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지만, 필리프 6세는 여기에 문제를 제기했다. 나바라 왕국과 샹파뉴 백국, 에브뢰 백국이 통합된다면 프랑스 국왕의 권위를 위협할 정도로 강대한 국가가 탄생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필리프 6세는 과거 외드 4세와 필리프 5세가 약속한 대로 브리와 샹파뉴 백국을 잔느에게 넘겨주기를 거부했다. 그 대신에, 코탕탱 반도의 일부인 모르탱, 벡생, 퐁투아즈, 보몽 쉬르 우아즈, 아스니에르 쉬르 우아즈를 넘겨주기로 했다. 이때 앙굴렘 역시 양도하기로 했지만, 필리프 6세는 죽을 때까지 앙굴렘을 넘기지 않았다. 그렇게 합의를 이룬 후, 잔느와 필리프는 쉴리의 영주 앙리 4세와 필리프 드 멜룬을 나바라 총독으로 선임해 통치를 대행하게 했으며, 통치 권한을 놓고 나바라 왕국의 귀족들과 긴 협상을 벌였다. 나바라인들은 잔느를 여왕으로 받드는 데엔 동의했지만, 지금까지 나바라 왕국과 별 관련이 없던 에브뢰 백작 필리프까지 왕으로 추대하는 것엔 주저했다. 하지만 잔느가 총독들을 통해 남편 역시 공동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그들은 1328년 11월 론체스발레스에서 열린 나바라 회의에서 이 문제를 놓고 협의했다. 그 결과, 그들은 필리프를 공동 왕으로 옹립하기로 했다. 다만 새 군주가 방패에 오르거나 군중에게 돈을 던지는 등 대관식의 모든 전통적인 요소들은 오직 잔느만 수행할 수 있다는 조건을 붙였다. 1329년 초 나바라로 향한 잔느와 필리프는 3월 5일 팜플로나 대성당에서 각각 '''[[호아나 2세]]'''와 '''[[필리페 3세]]'''로서 나바라의 공동 왕으로 등극했다. 그 후 두 사람은 나바라 통치에 긴밀하게 협력했다. 두 사람의 통치 기간 동안 발효되어 현재까지 전해지는 85개의 왕실 법령 중 41개의 문서가 두 사람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 호아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법령은 38개였고, 필리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문서는 6건이었다. 한편, 호아나와 필리페가 나바라 귀족들과 장기간 협의하고 있던 사이에 팜플로나에서 반 유대 폭동이 벌어져 많은 유대인이 막대한 재산 피해를 입었다. 두 사람은 즉위식을 마무리한 뒤 폭동 주모자들을 처벌하고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했다. 또한 왕궁의 요새들을 수리하고 카스텔레노에 새로운 성을 세웠다. 투델라 주변의 건조한 들판을 관리하는 관개체계도 두 사람의 지원으로 조직되었다. 또한 두 사람은 아라곤, 카스티야 왕국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기를 희망했다. 1329년 아라곤 국왕 [[알리폰소 4세]]의 아들 페로(훗날 [[페로 4세]])와 맏딸 호아나와의 약혼에 대한 협상을 시작했으며, 1330년 3월 15일 살라망스에서 카스티야 왕국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호아나와 페드로의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1336년 두 번째 딸 마리아와 페드로의 결혼이 성사되면서 나바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결혼 동맹이 맺어졌다. 부부왕은 1331년 9월 나바라 왕국을 일시적으로 떠나 각자의 영지를 관리했으며, 프랑스 총독들이 그들을 대신해 나바라 왕국을 관리헀다. 1335년 카스티야 왕국과의 국경지대에서 무력 충돌이 벌어졌지만 규모는 크지 않았고, 1336년 2월 28일 평화 협약이 재차 체결되었다. 1336년 4월, 두 사람은 나바라로 돌아와서 1337년 10월까지 직접 통치를 행사했고, 이후에는 다시 프랑스의 영지로 돌아갔다. 필리페는 몇년 후에 나바라로 이동했지만, 호아나는 프랑스에 계속 머물렀다. 1343년 9월 필리페 3세가 그라나다 토후국을 상대로 원정을 떠났다가 알헤시라스 공방전에서 화살에 맞아 치명상을 입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팜플로나로 옮겨졌고, 심장은 파리로 이송되어 쿠벵 드 자코뱅에 안장되었다. 이리하여 나바라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된 호아나는 나바라 총독 필리프 드 멜룬을 기욤 드 브라헤로 교체했다. 하지만 얼마 안가서 기욤 드 브라헤를 해임하고 장 드 콩플랑스를 선임했는데,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호아나는 나바라에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는데, 이는 [[백년 전쟁]] 동안 프랑스에 있는 자신의 영지가 잉글랜드군에게 침략당할 위험에 대처해야 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전쟁 초기에는 필리프 6세를 지지했지만, 프랑스군이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연전연패하자 1346년 11월 에드워드 3세와 휴전 협약을 맺고 잉글랜드를 더는 적대하지 않았다. 1349년 10월 6일 [[페스트]]에 걸려 사망했다. 이리하여 나바라 왕국의 카페 왕조는 막을 내리고 에브뢰 왕조가 들어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